Inconvenient to positive
참는다는 것의 유익은, 그로부터 배운 무엇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참고 인내를 하였는데, 그로부터 얻은 것이 없다면, 같은 참음의 반복에 내성이 생긴 것이기도 하며, 그 내성은 어느 정도 기간마다 반복을 해야만이 그것이 유지됨으로, 반복을 지향하는 참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참고 인내를 한 후, 그것을 통해 배우고, 반복이 아닌 무언가 좀 더 나은 삶과 혜택을 통해 인류는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쁜 것을 무작정 참으면 해가 됩니다만,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경우에는 별 도리가 없기에 그러할 것입니다. 때로는 참지 않아도 되는데, 타인의 시선과 공동체의 사회적 합의, 예절 등에 의해 그것을 참아야 하는 경우도 있으며, 이런 경우의 참음은 오랜 인류의 검증을 통해 입증이 된 것으로 그것이 공동체에 유익이 되는 부분이 많기에 그런 것이라는 이해를 가질 수 있습니다. 배움, 교육 등의 결과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인간에게는 내재한 기본적인 욕구, 세상적인 욕구 등이 있습니다. 그것도 때와 장소를 가리며 적절하게 해 나갈 때, 지지 받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은, 인류의 오랜 학습과 체험의 산물입니다. 물론, 근래 실시간 정보의 노출 등의 세대에 이것이 좀 재해석되어야 하는 것이 있기는 한 것 같습니다만, 그렇다고 본질이 다르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 가운데 어떤 욕구는, 이전에는 주로 남이 모르게 개인적으로 머리 속에서 가능했다면, 이제는 대체로 언제 어디서나 보고 듣는 것이 가능해 졌으며, 타인의 유혹에 때로는 작게, 때로는 크게, 자신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는 차이가 있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참음과 인내를 통해 불편에 머물러만 있는다면, 인생에는 변화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누군가는 변화가 없는 삶에 익숙하며, 그것이 좋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모습은 존재 가능합니다. 누군가는 참음과 불편보다 좀 더 나은 무언가의 시도를 통해, 삶의 부정을 넘어 긍정으로 향하게 합니다. 어느 쪽이든, 서로 존중, 대화, 의심, 회피, 논쟁, 다툼, 아픔, 화해 등을 통해 어디론가 계속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지구 공동체가 아는 듯, 모르는 듯, 어디를 향해 가고 있음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삶에는 발전한 것 같은데 살펴보면 정체, 때로는 퇴보한 것과 같은 모습이 있음을 들어, 항상 모든 분야에 걸쳐 발전해야 하는가라는 의문을 가질 수 있겠습니다만, 제 작품의 행보는 퇴보와 정체가 존재 가능함에도 발전하는 창작을 지향합니다. 우산입니다. 우산의 한 부분을 늘린 옆 모습입니다.
감사합니다. * 해당 작품 내, 우산 디자인의 경우 한국 특허청에 타인의 오래 전 출원된 디자인이 존재함을 발견하였음을 알려드립니다. 고의성 카피가 아니며, 언급한 바와 같은 창작의 일치이기에 작품으로서의 소개는 지속합니다. Nov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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